작가의 서문처럼 사람들은 지식보다 지혜를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직 책을 다 읽은 것이 아니다. 실천이 남았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철학이 우리 인생에 스며드는 순간 / 에릭 와이너 _북 리뷰
[행복의 지도]를 읽고 이 작가의 책을 더 읽고 싶었다. 그래서 읽게 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행복의 지도]가 여행을 통해 행복에 대한 의미를 찾는 내용이었다면 이번에는 14명의 철학자의 도시를 여행하며 그들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일상에서 그것이 얼마나 스며들어 있는지 고찰하는 내용이다.
책의 첫 장, 출발점에서 작가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한 번만 밀면 경이롭게도 세상 모든 지식을 접할 수 있는 지금, 우리는 그 지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충족되지 않는 배고픔을 느낀다' 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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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정보와 지식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지혜를 원한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정보는 사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고, 지식은 뒤죽박죽 섞인 사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혜는 뒤얽힌 사실들을 풀어내어 이해하고, 결정적으로 그 사실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턴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 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지식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지식이 늘면 오히려 덜 지혜로워질 수도 있다. 앎이 지나칠 수도 있고, 잘못 알 수도 있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지혜는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지혜를 운으로 얻으려는 것은 바이올린을 운으로 배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지혜의 부스러기를 줍기를 바라면서 비틀비틀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면서 혼동한다. 시급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말이 많은 것을 생각이 깊은 것으로 착각하며, 인기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 한 현대 철학자의 말마따나, 우리는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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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다. 처음부터 느낌이 좋았다. 책의 첫 장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이 책은 내내 철학자가 남긴 지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지혜가 현대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우리의 작은 일상에서부터 철학자의 사상을 적용하고, 천천히 그 철학자가 살고 그런 생각을 했던 장소를 여행하며 음미한다. 마치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듯이 . 그 어려운 철학과 사상에 대한 것들을 풀어내고 소소하게 아침에 깨 이불속에서 일어나기 싫은 매일의 일상부터 철학적으로 사고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플라톤의 책을 한 권 읽으라고 했으면 고개와 손을 동시에 절레절레 흔들며 온 몸으로 거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문득 여기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을 가볍게 풀어내고 있다.
나도 지금 시대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정보와 지식이라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어가며 필요한 것을 찾기에 급급했다. 이 책은 그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 더 마음이 차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작가의 서문처럼 사람들은 지식보다 지혜를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직 책을 다 읽은 것이 아니다. 실천이 남았다.
이 작가는 행복의 지도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게 글을 쓰지. 본인이 표현하기를 자신은 항상 투덜거리고 수다가 많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렇게 글도 편안하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는 건가. 아니면 직업이 기자라 글쓰기를 오랫동안 많이 해 와서 숙달된 기술인가. 그냥 가볍게 이야기하듯이, 어려운 철학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이렇게 쉽게 긴 글을 적어내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닮고 싶을 뿐이다. 책 내용에서 벗어나서 이런 생각을 할 만큼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오랜만에 꼭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은 책을 만났다. 작가의 또 다른 책도 읽어야지.
책에서_
태양이 훈련 교관 같은 다정함으로 내게 침대에서 나오라고 지시한다. 악마는 밤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침에 공격한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취약하다. 바로 그때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여기 있는지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는 때이기 때문이다.
몸 위로 연파란색 암트랙 담요를 끌어당기며 옆으로 돌아눕는다. 물론 나는 침대에서 나올 수 있다. 정말이다. 하지만 굳이 왜 그래야 하지?
장소는 우리가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만큼만 특별해진다. 월든에 오지 마시오. 소로라면 자신의 21세기 팬들을 꾸짖었을 것이다. 자신만의 월든을 찾으시오. 직접 만든다면 더더욱 좋고.
보는 행위는 의도적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조차 보는 것은 언제나 선택의 행위다. 소로는 제대로 보려면 “눈에 별도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핵심은 각도다. 소로처럼 온갖 각도를 다 활용한 사람은 없었다. 관점을 바꾸면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바뀐다.
“제대로 된 관점에서 보면 모든 폭풍과 그 안에 든 모든 빗방울이 무지개다”
관점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어떤 기억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가? 어쩌면 결혼식처럼 커다란 사건일 수도 있고, 우체국의 말도 안 되게 긴 줄에서 뒤에 선 사람과 나눈 뜻밖의 다정한 대화처럼 작은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가장 주의를 기울인 순간일 확률이 높다. 우리의 삶은 가장 열중한 순간들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유는 “가장 큰 희열은 가장 온전하게 주의를 기울였을 때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물건을 급작스레 잃어버리지만 그 상실은 점차로 서서히 경험한다. 우리의 자동차 키가, 지갑이, 마음이 그저 잘못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물건과 한때 소유했던 물건 사이를 나누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가파르지 않은 것은 아닌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비존재는 우리를 겁먹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향하는 대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문제인 것은 그 주체, 즉 ‘나’다.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랄 때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환상이다. 헤로인 중독자는 헤로인을 갈망하지 않는다. 헤로인을 하는 경험,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헤로인을 못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 즉 아타락시아다.
쇼나곤은 한 길에서만 머무르길 거부한다. 그녀는 “세련되고 우아한 것들”에서 “가치 없는 것들”로 방향을 꺾었다가 다시 “진정으로 훌륭한 것들”로 돌아온다. 쇼나곤이 길을 잃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쇼나곤은 “붓 가는 대로 따라간다”는 뜻의 즈이히츠를 하고 있다. 즈이히츠는 일본의 글쓰기 기법 아닌 글쓰기 기법으로, 내 눈엔 책이 아닌 책을 쓰기에 완벽한 방식으로 보인다. 즈이히츠를 실천하는 작가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따라가 지적 가려움을 긁은 다음,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글에 구조를 부여한다기보다는 구조가 스스로 나타나게 한다.
쇼나곤은 세상을 묘사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세상을 묘사한다. 중립적인 관찰은 없다.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안다. 몇 세기 후 니체가 발전시킨 철학 이론인 관점주의를 따른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쇼나곤은 말한다. 너만의 것으로 만들어. 누군가는 이 말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의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넘쳐나서라고 말이다. 소셜미디어 덕분에 이제는 언제든지 모두가 모든 것에 자기 의견을 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의견들은 친구들에게, ‘전문가’들에게, 그리고 가장 교활한 알고리즘에 크게 영향받는다.
그 결과 우리는 희뿌연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의 신념은 종이처럼 얄팍하다. 당신은 새로 생긴 스시집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그저 사람들이 별점을 다섯 개 줬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타지마할은 정말로 아름다운가? 아니면 인스타그램 속 황홀해하는 사진들을 보고 타지마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가? 세이 쇼나곤은 자기 렌즈가 투명하고 깨끗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일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했다.
소로가 가르쳐주었듯이, 우리는 볼 준비가 된 것만 본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작은 것을 볼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쇼나곤은 그렇지 않았다. 쇼나곤은 삶이 수만 가지 작은 기쁨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이런 불완전함을 향한 사랑을 일본인들은 와비라고 부른다. 와비는 해진 기모노와 땅에 쓸쓸히 떨어진 벚꽃 이파리, 희곡 한두개가 빠진 셰익스피어 ‘전집’이다. 찢어진 청바지나 낡은 가죽 가방을 구매한 적이 있다면 와비를 따른 적이 있는 것이다.
니체는 2층에 있는 방에 세 들어 살았다. 그대로 보존된 니체의 방에는 가구가 별로 없다. 니체가 살았을 때처럼 좁은 침대 하나와 작은 책상 하나, 동양풍 카펫 하나, 석유램프 하나가 전부다.
내가 일본에서 배웠듯 단순한 것이 꼭 부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것도 아름다울 수 있으며, 니체의 방에는 우아하고 미적으로 쾌적한 느낌이 있다. 니체는 자기 방 벽지를 직접 골랐다. 세이 쇼나곤처럼 니체도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니체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자기 삶의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가장 사소하고,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 니체가 말했다. 모든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난 후에는 과거를 돌이켜보며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패턴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지그재그다. 여백도 있다. 과거의 자신을 막 모습을 드러낸 미래의 자신과 갈라주는 텍스트 사이의 빈 공간. 이 여백은 무언가가 누락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백은 무언의 과도기이며, 우리 삶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다.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니체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나 소설가의 진실을 보여준다. ‘마치 그런 것처럼’ 접근법이다. 마치 눈에 보이는 표면 아래에 실재의 다른 차원, 예지체가 있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라. 마치 인생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삶을 살아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너의 세상을 환히 밝혀주는가? 좋다. 그렇다면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상을 다른 식으로 (그것이 허리를 굽혀서 다리 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던 소로처럼 ‘부정확’한 방식일지라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감정적 삶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헤라클레스의 기운과 슈퍼히어로의 파워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내면세계만을 제어할 수 있다. 내면세계를 지배하라. 그러면 ‘천하무적’이 될 것이라고, 스토아철학은 말한다.
에픽테토스는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몸을 맡기는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터무니없지 않나?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마음속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타인에게 이양해 그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만든다. 그들을 몰아 내야 한다. 지금 당장.
키케로는 궁수를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궁수는 자기 능력이 허락하는 한 가장 훌륭하게 활시위를 당기지만 시위를 놓고 나면 화살의 궈적이 더 이상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고 숨을 내쉰다. 스토아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테니스 경기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기를 펼칠 것.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말 것.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노화는 새로운 성격 특성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을 더욱 증폭한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보통 긍정적이지 않다. 돈 쓰는 데 신중한 청년은 늘 투덜대는 늙은 수전노가 된다. 감탄할 만큼 의지가 강한 젊은 여성은 짜증 날 만큼 고집 센 할머니가 된다. 이런 성격의 강화는 늘 부정적인 쪽으로만 흘러가야 하는 걸까? 나이 들면서 그 궤도의 방향을 꺾을 수는 없는 걸까? 더 나은 모습의 나이 든 내가 될 수는 없을까?
고대 그리스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었다. 바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이다. 시계 속의 분, 달력 속의 달이다. 카이로스는 딱 맞는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 무르익은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카이로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실존주의자가 되기도 전에, 실존주의자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전에 보부아르는 “내 삶은 현실이 될 아름다운 이야기, 내가 살아가면서 스스로 만들어낼 이야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게 바로 실존주의다. 따라야 할 각본도, 지문도 없다. 우리는 우리 삶이라는 이야기의 저자이자 감독이자 배우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반쯤 잠든 채로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본질을 혼동한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타인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타인의 시선대로 스스로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진정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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