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시는 개별적인 작품 하나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의 공간과 이동 동선까지 고려해 전체적으로 하나의 연극과도 같았다. 보고 나오는 길은 마치 영화 한 편, 연극 한 편을 보고 나오는 기분이었다.
현대차 시리즈 2022 : 최우람 [작은 방주]
이전에 현대미술관에 와서 파티션으로 가리고 전시 준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움직이는 조형물을 보며 '시작하면 꼭 와야지!' 했었다. 그런데 너무 기대가 커서 그런가 전시 입구의 큰 공간에 놓인 작품은 좀 실망스럽기도 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큰 광장에 인간의 형상을 한 지푸라기 더미와 가운데 크고 차가운 원반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온통 뾰족하게 생긴 납작한 무리들이 너무나도 서서히, 구름 지나가듯이 원을 돌고 있다.
이 ‹원탁› 과 ‹검은 새›에 대한 작품 설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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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을 올려다보시면, 회전하는 검은 새 세 마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새들은 아래에서 움직이는 원탁을 응시하고 있죠.
지름 4.5 미터의 원탁은 가장자리를 아래위로 기울이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데요,
시시각각 변하는 상판의 경사를 따라, 둥근 머리의 형상이 이리저리 굴러다닙니다.
원탁의 테두리 아래에는 18개의 지푸라기 몸체가 웅크리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상판의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지푸라기들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요,
머리가 없는 지푸라기 몸체는 등으로 힘겹게 원탁을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 움직임은 마치 원탁 위의 머리를 차지하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이는데요,
이 치열한 경쟁의 결과는, 꽤나 역설적입니다.
지푸라기 몸체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는 더 멀리 달아날 뿐이니까요.
그런데 이 경쟁에서 진짜 숨겨진 면은 따로 있습니다.
사실 이 원판을 기울이는 힘은 가운데 있는 구동부의 작용에서 나옵니다.
즉, 등허리가 고정된 채 원탁을 떠받치고 있는 지푸라기 몸체들은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고단한 움직임을 강요받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죠.
하나의 머리를 차지하기 위한 이 강요된 투쟁은,
무한 경쟁이 강제되는 현실의 사회 시스템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제 다시 고개를 들어 천장에 매달린 검은 새로 시선을 옮겨 볼까요?
원탁이 보여주는 형벌과도 같은 굴레를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는 이 새들은
경쟁에 뒤처진 희생자를 기다리는 걸까요?
아니면, 불합리한 경쟁과는 상관없는 세계에 속한 존재나 계층에 대한 은유일까요?
혹은 검은 원탁의 세계와 또 다른 체계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아슬아슬한 균형을 상징할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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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푸라기의 움직임은 치열하지 않다. 그냥 관절염이 걸린 것 같아 보인다.
원판의 작동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보면서 바로 '고장 났나?' 생각이 들 정도로 작동이 매끄럽지도 않고, 그 위의 검은 새와 함께 보면 더더욱 보고 있는 것이 지루하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어! 이거 관절염 치료제 마케팅에 사용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상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전시장 내부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폐기되는 차의 자동차 램프를 모아 빛을 내는 행성을 만들었다. 일정하지 않는 패턴의 빛을 보며 이렇게 재활용하여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멋있고 좋았다. 사물이든 행위이든 재활용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언제나 옮다.
전시 내부로 들어서면 작은 공간의 한쪽 벽에 빛을 내는 희고 큰 꽃이 바스락거리며 피고 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소재가 코로나 검사와 진료 현장에서 의료진들이 착용한 방호복의 재질과 같은 타이벡 섬유라고 한다. 방호복을 재활용한 것은 아니구나. 난 처음에는 이것도 재활용으로 만든 건 줄 알았다. 어쨌든 그 타이벡 섬유에 직접 그림을 그려 만든 꽃이 어두운 공간에서 우아하게 움직이며 은은하게 빛을 발산한다. 이때 이 공간이 주는 심상이 나중에 보게 되는 ‹빨강›과 비교하게 되어, 비슷한 크기의 공간과 조형과 움직임에도 색에 의해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이 재미있다.
다시 좁은 통로를 지나 길고 넓은 홀로 나가면 대형 구조물이 길게 서 있다. 30분 간격으로 20분간 작동하는 이 설치물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도 힘이 느껴진다.
한 바퀴 <작은 방주>를 돌며 구경하고 옆으로 죽 나열되어 있는 방석 한구석에 앉았다. 공연 시간이 되어 웅장한 음악에 맞춰 춤추듯 보여주는 방주의 동작이 매끄럽게 흐른다. 저런 무브먼트를 계획하고 동력 장치를 만들고 프로그래밍 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이 신기했다. 대체 어떻게 저런 상상을 하고 그걸 현실로 실행할 수 있을까...
<작은 방주>의 옆으로도 작품이 걸려 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천사>는 보기만 해도 지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기력함과 상실감, 일상에 지쳐 집으로 돌아올 때 즈음의 내 굽어진 모습도 보인다. 황금색의 조형에 생기는 그림자 때문에 더더욱 그 모습이 나에게로 투영되는 것 같기도 하다.
작품만 딱딱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 동선 곳곳이 잘 구성되어 있다. 반 투명하게 비치는 천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저 멀리 높이서 빛을 내는 <사인>도 의외다.
미로와 같은 통로의 마지막에는 처음 입구에 있던 것과 같은 꽃이 벽에 설치되어 있다. 이번에는 붉은 방에서 빛을 내며......
흰 꽃과 붉은 꽃, 검정과 붉은 공간에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이렇게 다르다. 이 전시는 개별적인 작품 하나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의 공간과 이동 동선까지 고려해 전체적으로 하나의 연극과도 같았다. 보고 나오는 길은 마치 영화 한 편, 연극 한 편을 보고 나오는 기분이었다.
전시 소개
- 기간 : 2022-09-09 ~ 2023-02-26
- 주최/후원 : 국립현대미술관 / (주)현대자동차
- 장소 : 서울 지하1층, 서울박스, 5 전시실 및 복도
- 관람료 : 서울관통합권 4,000원
- 작품수 : 설치, 조각, 영상, 드로잉 등 50여 점
이번 전시는 최우람 작가의 잘 알려진 기존 작업에 내재해 있던 질문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재구성한 하나의 공연 형식으로 기획되었다. 전에 없는 위기를 겪으며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은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의문을 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기후변화와 사회 정치경제적 위기로 인한 불안감과 양극화의 심화는 방향 상실의 시대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에 작가는 방주라는 주제의 전시를 만들고 동시대를 구성하는 모순된 욕망을 병치시켜 관람객들과 오늘 우리의 방향성을 함께 고민하고 질문하는 장을 마련했다.
서울박스 중앙에 놓인 검은색의 ‹원탁›을 받치고 있는 것은 머리가 없는 18개의 지푸라기 몸체이고 하나의 둥근 머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여기저기로 굴러다닌다. 이는 하나의 머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과 머리를 욕망하지 않아도 이 투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를 빗대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폐 종이 박스를 조각조각 붙여 완성한 세 마리의 ‹검은 새›가 천천히 회전하며 아래에서 벌어지는 힘겨운 싸움을 지켜본다. 누가 머리를 차지할 것인가? 누가 낙오자가 될 것인가? 누가 이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작은 방주›는 육중한 철제와 폐 종이 박스를 재료로 최첨단의 기술로 구현한 상징적 방주이다. 지구 생태계의 위기와 함께 우주 공간의 탐사가 가속화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35쌍의 노는 우리를 배제시키는 벽처럼 머물러 있다가 날개를 펼치듯 움직이며 장엄한 군무를 시작한다. 흑백의 방주의 춤과 함께 배 위에 올라탄 ‹등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 ‹두 선장›과 ‹제임스 웹›, 힘 없이 축 늘어진 ‹천사›, 항해 중인지 정박한 상태인지 애매모호한 ‹닻›, 그리고 위기에 처해서도 끝없이 욕망을 쫓는 인류를 비유한 ‹무한 공간›은 양가적인 현실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며 우리의 시선을 ‹출구›로 이끈다. 하나의 문이 열리면 다시 닫힌 문이 나오기를 반복하는 이 영상은 공간을 채우는 앰비언트 사운드와 어우러져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하고 현재를 성찰케 하면서 많은 질문을 자아낸다. 무엇을 위한 항해인가? 어디를 향할 것인가? 과연 출구가 있을까? 이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하지만 전시장 한편에는 뜨겁게 붉음을 토해내며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빨강›이 있다. 전시장 입구의 커다란 흰 꽃 ‹하나›가 팬데믹을 겪은 동시대인의 아픔에 작가가 건네는 헌화라면, ‹빨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자 생명의 순환을 의미한다. 진정한 자신만의 항해를 위해서는 절대자, 타인의 욕망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근본적 가치를 쫓아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구해야 한다. 최우람 작업의 근간인 설계도 드로잉이 암시하듯,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실존의 진정한 의미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폐차되는 자동차의 전조등과 후미등을 조립하여 별로 재탄생한 ‹URC-1›, ‹URC-2›가 눈부시게 빛나는 복도를 거닐며, 각자의 작은 우주를 항해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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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관람료는 서울관통합권 4,000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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